자동차를 빌려 십자가 언덕으로, 빌뉴스
아침부터 내리는 빗소리가 심상치 않다. 창문을 거칠게 때리는 빗소리. 아 오늘 도보 관광은 망했네. 어제 이렇게 비가 올 것 같아서 밤에 스카이스캐너 같은 어플을 이용해서 렌터카를 알아봤는데 빌리는 장소가 모두 공항쪽이라 난감했던 상황. 다행히 들어오는 길에 오빠가 숙소 바로 앞에 있는 렌터카 업체를 알아보고 오늘 아침에 들러 당일 렌트가 가능한지 알아보기로 했다. 오늘은 체크아웃날이니까 후다닥 정리하고 밥 묵고 나가서 차도 확인하려면 아침부터 바쁘다. 렌트가 안된다고 하면 어떡하지..? 쓸데없는 걱정이 잠깐. 아이고, 걱정해서 뭐하나- 그때가서 걱정하자 하고 식빵 봉지를 들고 2층으로 내려간다. 오늘은 빵이 참 맛있게 구워졌다. =)
오빠가 설거지하고 있는 사이 내가 잠깐 나가서 렌트카 업체에서 가능여부만 물어보고 오기로 하고 후다닥 뛰어나간다. 문이 닫혀있어서 잠시 앞에서 기다리니 청년 하나가 와 자리에 앉는다. 똑똑, 문을 두드리니 와서 문을 열어주는 청년. 오늘 차 빌릴 수 있어요? 물론이지. 어떤 종류? 작은거! 어떤 타입? 자동? 수동? 수동!! ㅇㅋ. 그럼 차 종은 토요타, 포드.. 토요타? 토요타 좋아. 얼마야? 한 26유로돼. 그럼 내가 뭐뭐 가져오면 되지? 여권, 운전면허증, 카드... ㅇㅋ. 나 숙소 바로 앞이니까 가서 가져올게~ 요러고 다시 숙소로 종종거리며 들어와 오빠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달. 다행이당 ^^
배낭과 캐리어를 호스텔에 맡기고 우리는 차를 빌리러 다시 업체로 이동. 내가 다시 왔어. 하고 여권 등등을 챙겨주니 전화번호, 이메일주소, 집주소를 적으란다. 집? 요기 앞에 호스텔~ 아. ㅇㅋ 하고 바로 계약서 작성, 디파짓으로 300유로를 결제하고 렌트비 26유로를 별도로 결제. 디파짓이 300 유로나 돼 ㄷ ㄷ ㄷ 언제 돌려주려나 내일인가 모레인가 떨면서 차를 확인하러 나간다. 작은 도요타 수동 자동차. 차에 흠집난 부분을 체크해서 알려주고 싸인. 오빠가 꼼꼼히 확인하고 싸인. 하지만 비가 와서 육안으로 정확히 확인은 안된다 ㅎㅎㅎ 앞에 있는 차를 청년이 빼고 오빠가 운전 시작. 난 사실 오빠가 시동을 10번은 꺼먹을 거 같아서 걱정했는데 왠일 한두번 꺼먹더니 부웅하고 운전을 곧잘한다. 급 기분 좋아진 나. 왜이렇게 운전을 잘해? 오빠가 생각보다 운전을 잘해서 다음 우리 자동차 여행이 엄청 기대되기 시작했어! 신이 나서 방방.
빌뉴스에서 3시간정도 거리에 있는 십자가 언덕으로 목적지를 설정하고 이동한다. 십자가 언덕은 사실 리가와 더 가깝긴 한데, 짐을 들고 갈 엄두가 안나서 갈지말지 결정을 못하고 있다가 오늘 차를 렌트한 김에 운전연습 겸 가보자, 싶어서 방향을 정했다. 날이 맑다면 체력이 있다면 리가에서 빌뉴스, 혹은 빌뉴스에서 리가로 가는 도중 중간에 들러 이동하는 것도 추천. 양 방향으로 가는 버스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짐을 맡아주는 장소도 터미널에 있는 듯 하다.
붕붕- 오빠가 기아를 열심히 바꾸며 운전을 하는데 빗줄기가 너무 세차다. 또 도로가 배수가 잘 되지 않아 옆으로 트럭이 지나가면서 뿌리는 물줄기 또한 만만치 않다. 미친듯이 와이퍼를 움직이면서 앞으로 전진전진. 하지만 초행길이고 비까지 미친듯이 오는데다 수동 운전은 오빠에게도 긴장이 되었던 듯 결국 네비를 잘 못보고 옆길로 빠지고... 난 순간 눈에 지진이 나며 말을 멈춘다. 네비게이션을 따로 빌리지 않고 유럽 내비앱을 다운받아서 쓰는데 이 아이가 엄청나게 민감한 듯. 실시간으로 변경되는 도로사정을 정말 실시간으로 알려준다. 감사하긴 한데, 너무 헷갈리는 것. 오빠 운전 잘한다고 좋아했더니 네비 못본다고 꿍얼꿍얼 옆에서 몇마디했는데, 우리 오빤 착하게도 그런 나를 이해한다. 네비를 잘 못봐서 미안해, 힝- 이러면 내가 더 미안해. 내가 옆에서 잘 도와줬어야 했오. ㅜㅜ
시속 130까지 허용되는 도로에서 우리는 90으로 달리며 헉헉거리며 간다. 아무래도 이 비는 어떻게 해도 익숙해 질 것 같지 않다. 잠깐 쉬어가자며 휴게소를 찾는데 네비에 표시된 휴게소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고속도로 휴게소가 아니라 국도 휴게소만도 못한.. 무슨 집 한채 떨렁. 그 와중에 문을 닫았다. ㅎㅎ 다음번 휴게소로 가자, 하고 달리니 주유소와 함께 있는 편의점 형식의 매점이 보인다. 그쪽에 차를 세우고 따뜻한 코코아와 아메리카노 핫도그 두개를 먹었다. 핫도그는 한개만 시킨 줄 알았는데, 왜 두개를 주니. 사실 돈 계산이 안맞아서 계속 내가 메뉴 가격을 세아렸었는데, 핫도그 한개가 추가로 나온다면 얼추 맞네. 그냥 묵자. 맛나다. 잘 쉬고 다시 출발. 붕붕- 가는데, 중간에 도로가 공사중인지 일차선 도로를 두고 양 방향에서 10분씩 너 가라, 나 간다 하면서 차를 보내는 중. 우와, 뒤에선 빵빵- 엄청 기다리니까 화도 나겠지, 우리도 화가 난다. 한참을 기다려 다시 달리고 결국 4시간이 넘게 걸려 십자가 언덕에 도착.
# 십자가 언덕 Cross Hill
빌뉴스에서 3시간 정도 떨어진 샤를레이 지역에 위치한 십자가 언덕은 사람들이 이곳에 십자가를 놓고 각자의 소원과 염원을 비는 것으로 시작했다고 한다. 그 기세가 커지자 리투아니아를 지배했던 러시아 등은 이 지역 십자가를 밀어버리고 없애려고 노력했다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몰래 가슴속에 품은 십자가를 하나씩 놓고가 더더욱 커졌다는 얘기를 읽었다. 타 민족에 지배를 당하면서도 포기할 수 없었던 개인의 민족의 열망이 십자가에 담겨있다고 생각하니 괜히 마음이 뜨거워진다.
인포메이션 센터 앞에서 1유로짜리 가장 심플한 십자가를 하나 사서 우리도 십자가에 우리의 소원을 담아 놓고 오기로 했다. 언덕을 한바퀴 둘러보고 적당한 장소를 물색. 우리가 정한 자리는 십자가 언덕 2가, 1길, 1번지다. 이렇게 말하면 기억할 수 있으려나 ㅎㅎ 정면에서 바라봤을때 3개의 길 가운데 두번째 길 첫번째 왼쪽 코너 가장 앞. 나는 십자가를 두며 우리의 남은 여행이 무사히 끝날 수 있길, 그리고 한국에 돌아가 예전과 같은 세속적인 삶에 목매어 살지 않길 기도했다. 좋은 회사에서 마음 맞는 동료들과 즐겁게 일할 수 있는 기쁨도 좋지만, 지금 우리가 추구하는 삶은 왠지 그 방향은 아닌것만 같은 생각이 들어 이 여행 와중에도 가끔 재미있어 보이는 제안이 들어오지만, 내 마음은 자꾸 주저하게 된다. 정말 그 길이 내가 갈 길이 맞나? 확신할 수 없는 걸보니 아직 때가 되진 않은 듯. 예전에 일본에서 돌아올땐 그렇게 일이 하고 싶어 미치겠더니, 지금은 그런 마음이 아닌걸보니 좀 더 고생해야겠다. ㅋ
다시 운전대를 잡고 빌뉴스로 돌아온다. 처음엔 비가 좀 내리나 싶었는데, 중간쯤 오니 비가 어느덧 개어 흐린 하늘을 보이고 있다. 시속 130까지는 무리지만 110 정도는 낼 수 있을 듯. 가는데 그렇게 오래 걸린 것도 달리 올땐 정확히 3시간. 주유까지 하고 업체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차 키를 보관함에 넣으니 7시. 배고프다, 여보야, 한식 먹으러 가자!
# 맛 Taste
어제 빌뉴스를 돌아다니다 발견한 한식집으로 이동. 메뉴판에 제대로된 한국어가 적혀있는 걸 보니, 여긴 진짜다- 싶은 마음이 들어 오늘 저녁 방문. 오빤 해물 순두부찌개가 먹고 싶다 하였는데, 그건 메뉴에 없어서 매운탕과 제육볶음, 떡볶이를 주문했다. 특별히 매운탕은 베리 스파이시! 하게 해달라고 함. 한국인 스탭이 있을 법 한데, 모두 외국인이라 다 영어로 주문했다. 메뉴만 한국어로 말하고. ㅎㅎ 김치, 오이초절임, 숙주나물, 단무지무침, 당근볶음? 같은 반찬이 깔리고 매운탕 등장. 진짜 이게 매운탕인가? 했는데 안에 깍뚝썰기한 네모난 고기를 먹으니 명태. 오오- 매운 명태국이로구나! 매운탕은 아니지만, 명태국도 환영이다, 하고 찹찹. 밥도 한공기 푸짐하게 나와 허겁지겁 입에 밥을 밀어 넣는다. 어제까지만 해도 오빠한테 신기하게 한식 생각은 별로 안나는거 같아, 라고 얘기했는데 나도 참 뻔뻔하지, 눈에 불을 켜고 밥과 반찬, 국을 먹는다. 곧이어 등장한 떡볶이. 떡이 딱딱하고 고추장으로만 맛을 냄. 양이 너무 적음. 그래도 오랜만이고 반가우니 찹찹- 다 먹어주고. 마지막 제육볶음은 삽겹살 불판에서 직접 구워준다. 양상추에 고기를 두점 착 올리고 마늘 한조각 고추 한조각 쌈장까지 놓려 싸먹으니 세상 꿀맛. 그래서 또 뻔뻔하게 오빠한테 한마디 했다. 역시 한국사람은 밥심으로 사나봐, 밥을 먹으니까 힘이 나네. 이렇게 말하고 빙긋. 빙구처럼 웃어보인다. 계속 일하는 언니가 맛있냐고 물어보는데 넘넘 맛있다고 대답해주었지.
맛있게 저녁을 먹고 숙소로 돌아가 짐을 찾아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한시간 반 정도 기다렸다 버스에 타면 된다. 야간버스는 처음인데, 뭐 별일이야 있겠어, 하고 간다. 내일부터는 폴란드다. 일주일 정도 있을 예정이니 좀 여유있게 지내봐야지, 생각만해도 기대된다. =) 쇼팽의 고장이여, 카이가 상을 받고 조성진씨가 상을 받은 쇼팽 콩쿨의 도시여, 기다려라, 내가 간다.
세상 이곳저곳/떠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