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엄쉬엄이라는 게 없구나? 이르쿠츠크
일찍 잠에 든 오빠가 왠일로 일찍 눈을 떠 부스럭부스럭 뭔가 준비를 한다. "뭐하게?" "울 애기, 아침해줘야징!" 히히. 감사합니당.
호스텔에 중국인이 많아 밤에 시끄럽진 않을까 좀 걱정을 했었는데, 너무 조용한 밤을 보내 오빠가 중국인에 대한 편견이 사라졌다고 할 정도로 고요한 밤을 보내고, 부엌에 나가 주섬주섬 냉장고를 뒤진다. 치즈를 자르고, 햄을 굽고, 오이와 토마토를 씻어 먹기 좋게 썰어낸다. 우리오빤 디자이너를 하지 않았으면 요리사가 됐을거야. 이렇게 눈도 즐겁고 입도 즐거운 정성가득한 아침식사를 오빠 덕분에 즐길 수 있다니, 행복! 넉넉하게 만든 샌드위치를 일부 도시락통에 담아 점심이나 저녁에 가볍게 먹기로 하고 밖으로 나왔다.
오빠가 짠 일정은 강을 따라 걷다가 중간 번화가에서 합류하여 쇼핑센터를 둘러보고 내려오는 일정. 오전 강바람을 맞고 걷는데 오늘이 주일이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오빠, 오늘 주일이야. " / "응응" / "집에 가서 간단히 같이 성경이라도 읽자" / "난 벌써 읽었는데?"
허얼... 좋냐? 혼자하니까 좋냐? 퍽퍽.
사진도 찍고 강바람도 맞으며 걷는데 뱃 속에서 신호를 보낸다. ㅋ 저 여기 있어요! 나가고 싶어요! 어머, 안돼안돼 얘들아. 여기 길바닥이야. 오빠 손을 꼬옥 잡고 눈빛을 발사. 오빠가 매의 눈으로 방향을 정하고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 ㅋㅋ 아놔. 생리현상이 급할수록 사랑이 강력해 지는 느낌. 번화가 초입에 있는 타일이 예쁜 까페에 들어가기로 결정. 러시아의 까페는 일반 레스토랑이라 식사를 하는 사람이 많지만, 뭐
난 배가 고프진 않으니. 카푸치노 한잔과 오빠의 레몬/오렌지 스쿼시, 딸기바나나 펜케익?을 주문하고 잠시 평화를 누린다. 피스- 급하게 들어온 것 치고 건물도 이쁘고 커피도 맛있다. 영어메뉴도 있고, 주문받는 언니가 영어도 잘한다. 사진도 찍고 희희낙락거리다가 다시 나와 걷기로.
가는 도중 천문대? 비슷한 뭔가가 있어 나중에 들르기로 하고 우선 쇼핑센터. 어제 동네에 있던 쇼핑센와 규모와 매장, 분위기가 완전 다르다. H&M 매장도 있고 나름 멀티플렉스 영화관도 있다. 큰 마트도 있고. 마트를 좋아하는 우리는 또 마트 쇼핑. 토마토와 마늘 그림이 그려진 하인즈 케챱하나와 휴지 등을 구입. 고추장과 케챱하나면 두려운 음식이 없다는 호갱커플이외다. 에헴.
건물 옥상으로 올라가니 왠 대형 체스판이 있다. 바닥을 체스판 형태로 만들어 놓고 어린이 크기만한 체스말들이 흩어져 있다. 체스 덕후인 우리 오빠. 제가 오빠를 위해 체스말을 예쁘게 정렬해 둬 보겠습니다, 하고 킹과 퀸을 잡아 옮기기 시작. 얘가 비숍? 얘는 폰? 자리를 잡고 오빠가 말을 이리저리 옮기는데 오빠의 비숍에 내 룩이 당하게 생겼다. 아악- 하면서 사진 한장. ㅋㅋ
건물에서 나와 천문대로 다시 들어갔다. 3시부터 뭘 한다는데, 무료. 공짜는 환영이죵. 아직 20분 정도가 더 남았다. 내부를 구경하다 멍하니 앉아있다 하는데 어느새 사람들이 안보인다. 음? 이쪽이 입구가 아녀? 하며 반대쪽으로 가보니 극장처럼 생긴 좌석에 사람들이 앉아있고, 앞엔 스크린 대신 원형 돔과 같이 생긴 스크린이 둥그렇게 천장을 가득 메우고 있다. 러시아 청년이 들어와 설명을 시작하고 영상을 보기 시작. 영상은 주로 우주 탐사, 태양계, 은하계 설명과 같은 느낌적인 느낌. (러시아어 1도 모르니까요, 그림만 봤죠) 하늘을 뒤덮은 별 영상을 한참 바라보다 청년이 다시 등장. 이제는 각 별들을 하나하나 설명해준다. 그리고 익숙한 별자리들. 나는 사수자리, 오빠는 물병자리. 큰 곰자리와 작은 곰자리를 찾고, 전갈자리를 찾고. 잡지책 속 별자리운세에서만 보던 별자리들이 실제 하늘에 어떻게 그려지는지 알 수 있어서 너무 좋았던.
배가 살살 고파질 시간이라 다시 쇼핑센터로 들어가 슈퍼피자에서 피자, 샐러드, 밥 등을 주문하여 아침에 싼 도시락과 함께 흡입하고 밖으로 나왔다. 근처 보이는 러시아 정교회. 예쁘다, 를 연발하며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곧이어 들리는 음악소리. 사람의 목소리로 성가를 부르는 듯. 아카펠라다. 가만히 듣고 있으니 눈물이 주룩주룩. 나 왜 또 주책이니. 성실하게 다른 악기 하나 없이 오직 사람의 목소리로 신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와 함께 음악에 맞춰 성호를 긋고 기도를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신에 대한 순수한 사랑과 열망인 것 같아 나도 괜히 마음이 뜨거워진 듯. 모자를 쓴 남자는 모자를 벗고 들어가고 여자는 머리에 스카프 등을 둘러 신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표현한다.
오늘 전반적으로 쉬엄쉬엄 다니는 것을 목표로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는데, 교회에서 우연히 마주친 겁나신나 부부가 그린라인을 따라 오늘 관광했다는 걸 듣고, 아- 그린라인.... 했는데, 결국 우리도 그 길을 쫒아 다니고 말았다. 절대 오늘은 쉬엄쉬엄이 목표였는데. ㅡㅜ. 이후 라인을 쫒으며 좋은 것들 예쁜 것들을 많이 보긴 했지만 춥고 피곤하여 마음껏 즐기진 못한 느낌. 그냥 우리 페이스대로 설렁설렁 다닐껄 그랬어. ㅡㅜ
아, 우리 호스텔 앞에 공연장이 하나 있는데 벽에 걸려있는 현수막 중에 하나가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라 이거 오늘!!! 하면 오늘 보러 간다!!! 하고 공연장에 들어가 티켓을 문의하였더니 9월 26일부터.... 또로로... 저도 지브라 오케스트라 보고 싶어요 ㅠㅠ 9월 말, 10월 초에 이르쿠츠크 방문 예정인 분들 중 관심있는 분들은 보셔도 좋을 듯 하다. 부... 부럽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