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이곳저곳/떠나다.

마지막 날까지 꽉차게, 크라쿠프

갱양- 2017. 10. 7. 05:47

잘잤다. 이어플러그는 효과가 있다. ㅋ

오늘은 크라쿠프를 떠나는 날. 아침부터 워킹투어를 신청해 놔서 서둘러 짐을 정리하고 나가야 한다. 예전엔 짐을 다 꺼내고 물건을 열고 닫고 난리였는데 이제는 요령이 생겼는지, 아님 게을러진건지 가방도 잘 열지 않고 물건도 안꺼내고 없음 없는대로 눈에 띄면 눈에 띄는대로 사용하거나 생략하거나. 뭔가 편해졌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나, 가끔은 이래도 정말 괜찮은건가 하는 자괴감이...
어제 식당에서 남겨온 음식과 빵 남은 것 그리고 뜨거운 홍차 두잔을 우려 아침 식사를 한다. 평소 커피는 즐겨마셨지만 홍차를 그렇게 즐기진 않았는데, 씁쓸한 맛이 입을 깔끔하게 해주니 아침엔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구나. 피에로기 남긴 걸 렌지에 데워 먹는데 맛이 여러가지다. 어제 먹을땐 엄청 맛있었는데 오늘 고른 피에로기 중에서는 내가 좋아하지 않는 맛도 포함. 복불복이었구나.;; 설거지를 하고 오빤 짐을 마저 정리해 나와 리셉션에 짐 보관을 부탁하니 사물함 열쇠를 건넨다. 큰 가방은 들어가지 않아 숨겨놓고 작은 가방만 사물함에 넣고 키는 내가 보관. 고마워! 외치고 후다닥 나서는 우리.

# 유대인지구 프리워킹 투어
예매사이트 :
사실 오늘 저녁 5시에 소금광산 예매를 해 두었는데, 낮에는 뭘 할까 하다가 어제 아우슈비츠에 이어 크라쿠프에 가장 큰 마을을 형성했다는 유대인지구를 가기로 했다. 뭐- 동유럽관련 도서를 다운받아 조금씩 읽고 있긴 하지만 아주 대략적인 내용 뿐인지라 워킹투어를 하기로 하고 온라인 신청. 계속해서 들리는 영어때문에 엄청 스트레스 받을 것 같긴 하지만 무료투어이니 적당히 따라다니다가 머리끝까지 스트레스가 올라오면 도망가는 걸로.
모임장소는 유대인지구 회당 앞이다. 부랴부랴 준비해서 출발했는데도 남은 시간이 10분. 숙소에서 회당까지 걸어서 10분. 아슬아슬 하겠구나, 하고 달리듯 걸어가는 우리 둘. 힘들어서 뛰진 못하고 조금 빨리 걷는 수준이랄까. ;; 도착하니 노란 우산을 쓴 청년 둘이 서 있다. 어느쪽인가 싶어서 망설이고 있으니, 무슨 투어 왔어? 이런다. 유대인 투어. 아, 저쪽. ㅇㅇ 키가 작고 수염이 덥수룩한 청년이다. 젊어보이는데 수염때문에 나이를 5살은 더 먹어보이는 듯. 일부러 그런가? 엄청 쾌활한 청년이다. 다행히 많이 늦진 않은 듯 계단에 앉아 다른 사람들을 조금 더 기다리다 출발. 전체 이동 인원이 20명쯤 된다. 어마어마하네-
아우슈비츠가 크라쿠프에 있을만큼 이 지역은 유대인들이 밀집해서 살고 있는 동네였다. 주변이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누군가는 그렇게 안쪽에 갇혀 살면 답답하지 않겠느냐, 했다는데 오히려 보호 받는것 같아 더 좋아했다고. 그렇게 모여사는 그들은 폴란드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유대인들의 율법을 따라 살았다. 따라서 그들만의 법원이 있었고, 그들만의 정부가 있었고, 그들만의 회관이 있었다. 양쪽에서 정한 규칙을 모두 지키며 살아야 했던 사람들.
시나고그에 들어갈때엔 모자를 쓰고 들어가 그들 종교에 대한 예의를 지키고 걸으며 2차 세계대전 중 단계적으로 행해졌던 유대인들에 대한 차별과 분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처음엔 그들이 다닐 수 있는 가게와 그렇지 않은 가게를 구분하고 그들의 팔에 유대인임을 알아볼 수 있는 식별표를 하게 하고 그들이 지나가면 신분증을 검사하며 점점 그들이 다닐 수 있는 지역을 구분하고- 독일인들이 시작했지만 이것이 일반화되자 자연스레 폴란드인들도 그들을 차별하기 시작하고 시간을 들여 하나씩 하나씩 정상적인 것을 비정상이라 구분하고 밀어내니 따르기 시작한 사람들. 학교에서 왕따가 이렇게 생기는건가. 소름끼치도록 무서운 체계적인 정신개조.
도망갈 타이밍을 잡지 못하고 우린 결국 끝까지 따라가고 말았다는.;; 3시간이나 쉬지 않고 걸었다. 마지막은 기차역인데 실려가는 유대인들이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른채 집에서 의자를 들고 나와 하염없이 앉아 기차를 기다렸다고. 그래서 광장엔 집에서나 볼 법한 등받이 있는 1인용 나무의자가 띄엄띄엄.
내가 제대로 들은 건지, 누군가의 블로그에서 대충 읽고 기억나는대로 적은건지 알 수는 없는 상황이라;; ㅎㅎ 누군가 이 글을 본다면 감안하시길. 유대인 투어에선 어제 아우슈비츠 투어때 만난 폴란드 유학생 세엽군을 다시 만났다. 새벽 4시까지 마시고 투어 참여하겠다고 달려왔다. 젊구나, 그리고 기특하다. 내가 4시까지 마셨으면 난 12시까진 누워있었다.;;

# 중국집
투어 후 배가 고파진 우리. 숙소 근처에 있던 중국집으로 가기로 하고 열심히 달려가 주문까지 완료. 그런데 매대 옆에 현금만 받는다고 써있다. 아아? 우리 현금 1도 없는데? 급 사색이 된 갱양. 지갑을 들고 나 돈 찾아올게-하고 우선 뛰쳐나갔다. 그런데 여기서 시티은행까지는 왕복 30분. 밥이 나오고 다 먹고 나올 시간이다. 시티은행 불가. 옆에 바로 붙어있는 atm 에서 인출 시도. 뭘 눌렀는지도 모르고 막 눌렀는데 돈이 나온다. 우와! 하면서 보니, 1000즈워티. 우리돈 30만원 정도. 에라이.;; 이렇게까진 필요 없다고;;;; 아 몰라 하고 울면서 다시 중국집으로 인. 오빠에게 보여주니 너 아무거나 막 눌렀구나, 이런다. 눈치빠른놈. ㅇㅇ 쓸만큼 쓰고 재환전해. 몰라. 유로로 바꿔.잘했다. ㅇㅇ
얼마 지나지 않아 나온 음식. 달고 짜고 맛있다. 우린 왜 여태 중국음식을 먹지 않았을까. 이렇게 기름지고 맛있는걸- 고개를 주억거리며 밥을 먹는 오빠, 사랑합니다. 많이 드세요-

# 올드타운&바벨성
현금으로 무사히 결제까지 마친 우리는 소금광산 가기 전 다시 올드타운 투어를 하기로 하고 광장으로 이동. 주로 밤에 많이 봤던터라 낮에 보니 다르다고 쓰고 싶지만 똑같다. 매우 똑같다. ㅎㅎ 혹시 못본 건물이나 놓친 유적지가 있을까? 싶지만 너무 좁은 동네라 많이 봤고 두번봤고 세번봤다. 그래도 가장 오래됐다는 시장도 다시 들어가 물건도 찬찬히 살펴보고 천장에 무슨 칼이 꽂혀 있다던데, 그것도 좀 찾아보고 어슬렁 어슬렁.
바벨성에 들어가 보짐 못했으니 거기나 한번 들어가 볼까하고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한낮의 태양이 덥게 느껴지는 날, 그냥 어디 앉아서 차나 마시고 노닥거리면 좋으련만 우리는 왜 이렇게 어딜 가고 뭘 보려하는지;;; 난가;;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다. 무슨 강박걸린 아낙마냥.
바벨성 매표소로 올라 구매할 수 있는 티켓을 살피니 대부분 매진. 하. 궁전 안도 입장수 제한이 있어 끝났고 특별전시도 끝. 갈 수 있는덴 전망대와 스모크챠야마. 전망대는 어제 봤을때 탁 트인 공간이 아니라 막힌 탑처럼 생긴 공간이라 그닥 매력적으로 보이진 않아 패스. 어뜩하냐, 갈만한데가 없네;; 그냥 올라가볼까하고 좀 더 오르니 성당이 오픈되어 있다. 성당 안도 일부 구역은 티켓이 필요하나 굳이 티켓을 구입하지 않아도 꽤 안쪽 구석까지 살펴볼 수 있게 되어있어 나름 괜찮다. 하지만 성당의 아름다움에 지친 우리에겐;; 아 그렇구나 정도의 감흥밖에;;;
얼추 시간이 되어 숙소로 가서 짐을 가지고 버스 터미널로 가야한다.터미널에 짐을 보관하고 소금광산에서 바로 돌아와 근처 맥도날드나 버거킹에서 쉬다가 버스타고 부다페스트로 이동하면 될 듯. 짐을 질질끌고 터미널로 걷는 둘. 이렇게 큰 캐리어를 들고 세계여행이라니 새삼 웃음이 나온다. 짐을 최소화하고 배낭하나에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들만 가지고 기동성있게 움직이는 여느 여행자와는 달리 우리는 뭐가 그리 아쉬운지 이것도 필요해, 저것도 필요해하며 가방에서 빼낼 생각은 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짐을 늘이고 있으니;; 뭐 어느순간 어떻게든 되겠지;;

# 비엘리츠카 소금광산
사물함에 짐을 넣고 겁없이 인출된 돈을 다시 달러로 환전하고(에잇) 어쩌고 하는 사이 시간이 훌쩍 지났다. 터미널 근처 정류장에서 소금광산까지 30-40분은 걸리는데 이미 4시 반. 소금광산 예약시간은 5시 15분. 조급해진 마음에 달려 버스 정류장까지 가니 다행히 버스가 서있어서 올라탔다. 그런데 또 다시 난관. 폴란드의 버스 안에서는 기사님께도 티켓 구매를 못하고 오직 기계로 해야하는데 우리 나라 카드는 인식 불가. 으악- 헤메고 있으니 밖에 티켓판매기가 보인다. 내가 나가서 사올게!! 하고 뛰쳐나가 티켓 구입. 다행히 버스는 출발전... 이라고 해야하나;; 이미 시간은 4시45분을 넘어간다. 점점 조급해지는 마음. 찾아오는 불안과 초조. 괜한 짜증과 우울. 수렁에 빠지고 있는 갱양. 티켓 날려도 괜찮아- 하고 애써 합리화시켜보지만 자꾸 티켓 가격이 눈에 밟힌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예매하지 말껄- 현장에서 살껄 ㅠㅠ 수렁에 빠지고 있는 갱양을 보며 옆에 호군은 위로위로 토닥토닥. 괜찮아- 괜찮을거야- 해결되기전엔 위로가 안돼. 미안.
바닥까지 내려앉은 기분으로 소금광산에 도착하니 이미 입장시간에서 15분 정도 늦은 상황이다. 입구에 바로 온라인 매표소가 있어 울듯한 표정으로 예약했는데 늦었어 하고 침울하게 말하니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괜찮아 다음 투어가 6시인데 인원이 남으면 같이 들어가면 돼. 뭐라고!!!! 급 좋아진 표정에 싱글벙글 신이 난다. 이런 얄팍한 인간 같으니라고. 고거 하나에 나라 잃은 사람처럼 절망하다가 그 한마디에 세상을 다 얻은 사람처럼 기뻐하다니;; 아직 멀었다 나도.
입장 시간까진 여유가 있어 따뜻한 커피 한잔으로 몸을 녹이고 사람들이 줄을 서기 시작해 우리도 서둘러 뒷쪽에 선다. 소금광산은 무조건 가이드 투어만 가능하기 때문에 광산에 입장하기 전 가이드로부터 간단한 설명을 듣고 수신기를 착용한 뒤 내려가는데 우리의 가이드는 중년 여성분. 구사하는 영어나 발음이 굉장히 우아하다. 간혹 유머라고 한마디씩 던지기는 하는데 말투에서 이미 진지를 장착하고 있어 유머로 들리지 않거나, 농담처럼 받아들이지 못하고 진지하게 믿어버리는 일들도 발생. 그래도 듣기는 매우 좋았어요.
일행을 따라 하염없이 계단을 내려가면 지하 광산에 다다르게 된다. 소금광산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떻게 소금을 캐 이동시키는지 등에 대해 설명을 듣는다. 지나가는 대부분의 통로와 바닥은 모두 소금. 가이드분이 자꾸 벽을 맛보라는데 이게 진심인지 농담인지 알아듣지 못해 다들 머뭇머뭇- 내가 용기내어 혓바닥으로 낼름- 으악- 짜다. 확실히 소금벽!! 내 모습을 본 다른 사람들이 큭큭대다 조심스레 입을 가져간다. 벽에 수 많은 사람들의 침이 흥건했겠구나... 좀 구석에서 해볼껄;;; 오빤 하기 싫다고;;; 흥 칫 뽕이다.
소금광산의 하이라이트는 성당. 광산 내에 몇십개의 성당? 혹은 예배당이 있는데 소금벽을 조각해 만든 각종성화들-최후의 만찬 같은 그리고 십자가, 마리아상, 샹들리에가 늘어진 메인성당은 주요 종교 행사나 결혼식때 실제 예배당으로 사용된다고 한다. 성당에 들어서기 전 음악에 맞춰 성당 내부의 조명을 이용해 조명쇼 같은걸 해주는데 정말 넋을 잃고 바라봤다. 지하 몇백미터의 광산에서 사람들은 벽을 깎고 조명을 만들어 멋진 성당을 완성하고 주님에 대한 신실한 사랑과 애정을 표현하고 기도드린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그려지는 듯.
이후 식당과 기념품샵, 영화관을 차례로 둘러본 뒤 기념품샵 앞에서 한참을 고민하다 소금돌 하나를 오빠가 골랐다. 통에 들어있는 소금이나 소금결정 같은 것들도 있어서 뭔가 실용적인 느낌이라면 그것들이 나았겠지만 그런 소금은 어디서나 살 수 있으니- 여기서밖에 구하지 못할 것 같은 소금 돌맹이. 나중에 집에 놀러오는 사람들한테 다 맛보라고 해야겠다. 침 범벅이 되겠구나. ㅋㅋ

투어를 마치고 올라오니 이미 시간은 8시가 다 되었다. 부다페스트로 가는 버스는 12시즈음. 아직 3-4시간이나 더 남았다. 버스 정류장에서 한참을 기다려 버스를 타고 돌아가는 길. 오빠가 내 모자 어디있지? 하며 모자를 찾는다. 글쎄- 오빠가 챙기지 않았어? 내가 쓰고 있다가 오빠 줬자네- 음? 놓고온거 같은데? 어디? 중국집. 에엑?????? 그럼 어떡해- 급 기분이 안좋아진 오빠. 괜찮아 잃어버려도- 했는데 표정이 똥. 이게 아닌가. 그럼 우리 시간도 많이 남았는데 찾으러 가볼까? ...그럴까? 정답이구나.ㅎ 그런데 우리가 탄 버스는 그 근처로 가질 않아 혹시 간다면 꽤나 걸어야 하는 상황. 나는 걷는거 괜찮은데 오빤? 나도 괜찮아! 그래, 그럼 찾으러 가자! 하고 버스를 타고 가다 바벨성이 보이는 다리에서 내려 중국집을 향해 걷기 시작. 크라쿠프 올드타운과는 또 다른 시가지의 밤이 눈에 들어온다. 20분쯤 걸었을까. 눈에 보이는 가게. 서둘러 들어가니 매장 언니가 알은체를 한다. 우리 모자.. 하니 ㅇㅇ 갖다줄게- 꺄핫. 여기 있었구나! 고맙다고 백번쯤 말하고 가게를 나서는 우리.

유대인투어부터 모자찾기까지 하루가 너무너무너무 길고 다리가 너무너무너무 아프다. 그런데도 아직 우리에겐 부타페스트행 야간버스 탑승이라는 퀘스트가 하나 더 남았다. 저녁도 못먹었고, 배고파서 낮에 산 오빠자기빵 하나를 야금야금 뜯어먹은게 전부. 후다닥 터미널로 가서 버거킹에 앉아있어야지- 햄버거도 하나 먹어야지- 먹는 생각에 다시 달리는 호갱커플. 우리는 오늘도 신나게 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