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한푼도 쓰지 않은 날, 비엔나
어제 오빠가 마켓광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허리가 아프다고 했는데- 숙소에 돌아와서 저녁을 먹을때 쯤 쿨럭쿨럭 기침을 하기 시작. 빨리 자면 괜찮을까 싶어서 서둘러 잠자리에 들었는데, 잔건 나뿐. 오빤 다시 일어나서 사진 정리며 자동차 여행 루트를 정리한 듯 하다. 결과 오늘 아침 완전히 뻗어버린 오빠. 창 밖으로 보이는 건넛집 나무는 바람에 미친듯이 흔들리고 지금 우리가 묵고 있는 숙소엔 난방기 같은건 없는 듯.
어제 남은 밥에 물을 붓고 끓여 누룽지를 만들어 먹었다. 아침부터 생선튀김에 감자튀김도. 이게 왠 안어울리는 조합인가 싶지만 이곳에 머물면서는 기름을 잔뜩 쓰기로 하고 식용유를 하나 구매한터라 아낌없이 써주겠다는 마음으로 식용유를 콸콸붓고 튀겼더랬지. 생각보다 기름을 많이 먹는다. ㅡㅜ 그래서 오늘 아침 조합은 누룽지, 감자튀김, 생선튀김, 피클... 아 이상하지만 어쩔수 없었어. 약을 먹이고 시럽도 하나 먹이고 오빤 다시 침대로 숑. 나는 간만에 밀린 블로그 정리나 할까 했는데 틀어놓은 나츠메 우인장에 정신을 뺏겨 도무지 집중할 수 없다. 에라이 만화나 보자.
슬슬 다시 배가 고프다. 점심은 파스타다. 어제 산 리가티니를 삶고 양파를 다진 다음에 볼로네제 소스와 함께 볶아 리가티니면을 함께 넣고 볶은 뒤 모짜렐라 치즈를 잔뜩 올리고 냄비뚜껑을 손으로 잡고 덜덜 떨면서 잔뜩 녹을때까지 잠시 기다리면 완성- 오빠가 요걸 만들때 일어나서 냄비뚜껑을 잡아줬다. 요런 고마운 오빠 같으니라고.
다시 오빤 나츠메 우인장 한편보고 숙면. 난 다시 나츠메 우인장 정주행- 만화보랴 블로그 정리하랴 정신없지만 정신 없는 와중에도 마냥 놀지는 못하겠다. 밀린 블로그만 생각하면 죄책감이... 오빤 잘도 자는구나.
파리로 날라가면 자동차 여행이 시작되는데 자동차 여행을 하는 동안 우리는 어떻게 될까. 어딜 가고, 어디서 자고, 무얼 먹을까 슬슬 걱정이 된다. 오빠가 알아서 하겠지 싶었는데 알아서 정말 하려나? 지금 저렇게 감기에 걸려 쓰러진 오빠에게 맡겨도 되나? 내가 막 나서서 알아봐야 하는건 아닌가?
자동차를 타고 유럽 전역을 둘러보는 일도 기대되긴 하나, 지금 오빠와 난 어딜가나 비슷한 올드타운, 성당, 궁전에 어떤 감동도 감흥도 받지 못하고 있는 상태. 이런 상태로 여행을 계속한다면 각 도시를 돌며 도장깨기 수준의 도시 방문밖에 되지 못할 터. 내가 평생 할 수 없는 여행을 떠나왔고, 그 시간을 이렇게 쓰고 있는데 난 지금 뭐든 할 수 있는데 고작 도장깨기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 여행을 하고 있는건가 하는 자괴감이... 이 여행의 패턴을 바꿔야 할 때가 온 듯.
자동차는 한달간 빌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이란건 뭘까. 그다지 가고 싶지 않았던 도시들을 포기하는 대신 정말 가고 싶었던 나라에서의 한달은 어떨까... 하는 생각도. 스페인과 포르투갈 가고 싶었는데... 내가 이 나라들을 선택해 버리면 독일이나 스위스, 이탈리아 같은 유럽의 심장이라 불리우는 나라는 가지 못하게 되는데 괜찮을까. 너희 유럽은 어디어디 갔다왔어? 라고 물을때 동유럽이랑 스페인이요 밖에 대답을 못할텐데 이상하지 않나- 하는 남의 눈을 걱정하고 있다.
난 왜 남의 눈을 걱정하고 있나.;;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 시작한 여행은 아니었는데 어느새 난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도장깨기를 하고 있었던 건 아닌가- 여행을 시작한지 50일만에 겨우 지금 내 상태를 깨닿는다. 이걸 먹어야해, 이걸 봐야해, 이걸 해봐야해 하는 강박. 그런 강박에 휩싸여 마음 편히 어느 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이틀이나 삼일만에 도시를 이동하고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찾아 헤맸던 나. 바보같다. 계속해서 밀리는 블로그를 걱정하면서 실제 내가 하고 있는 건 밀린 영화나 만화를 보는 것 뿐.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 도시를 떠나도 괜찮은걸까 하는 불안함에.
또 생각한다. 이렇게 내멋대로 결정해버려도 괜찮은걸까 하고. 오빠가 일어나면 한번 제대로 얘기해봐야지. 우리의 앞으로의 한달에 대해 내가 더이상 조급해지지 않길 바라며.